이병주 문학관을 찾아서
이명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이병주문학관을 하동군 북천에서 만났다.
지리산이 겪은 골깊은 역사를 닮아있는 소설가 나림 이병주.
격동의 세월 속에서 지식인이 고스란히 안아야 하는 문제를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표현했다는 이유로 많은 핍박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자 이병주는 이를 비판하며 ‘내게는 조국이 없다. 산하(山河)가 있을 뿐이다’는 내용의 논설을 썼다가 혁명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은 필화 사건은 그의 역사에 늘 따라 다니는 수식어다.
그를 만난다는 이유만으로도 가슴 셀레었다.
특히 문학관이 고급문화의 공간에서 벗어나 지역민들과 호흡하고, 그들의 행사를 지원해줄 수 있는 실직적인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문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곳이 문학관이니, 대중과 소통하는 기회와 장을 확대하자는 생각이 현실에서 뿌리를 내렸으면 좋겠다.
문학관 내부는 '
냉전시대의 자유인, 그 삶과 문학’, ‘한국의 발자크, 지리산을 품다’, ‘끝나지 않은 역사, 산하에 새긴 작가 혼’, 아직도 계속되는 월광 이야기’로 나눠서 시대 순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일정 탓에 모두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곧게 걸어갔을 문학의 길은 후인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관 외부나 내부에 펜을 부각시킨 것은 펜의 힘뿐만 아니라 문인들에게 경고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문학관을 나오니 고뇌하는 이병주 상이 있었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많은 이야기를 내려놓았다.
'관부연락선'(1972) '예낭풍물지'(1974) '망명의 늪'(1976) '지리산'(1978) '바람과 구름과 비'(1978) '산하'(1979) '행복어사전'(1980) '소설 남로당'(1987) 등을 집필한 이병주는 술, 여행, 친구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폐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수많은 단편소설들을 펴낼 수 있었던 것은 집필 시간만큼은 방해받지 않고 몰두했다는 수많은 일화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런 거목의 선생님을 문학을 통해 만나는 행복, 짧지만 깊은 힐링 그리고 새로운 각오를 지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다.
문학관 앞에는 북천의 축제를 연장해놓은 듯 하늘하늘 가을 풍경을 더하고 있는 코스모스가 장관이었다.
나림만큼 치열하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소름처럼 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