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언제였던가?(공지영)
종일 비가 내린다.
굵은 빗방울이라도 쏟아지면 좋으련만 회색빛 하늘에 가끔씩 보슬비만 내리고 있으니 마음이 심란하다.
다행히 읽고 있는 책이 있어 외출을 삼가고 틀어 앉았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다.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봉순 언니>, <인간에 대한 예의> 등 이것저것 공지영의 작품을 제법 읽었지만 이 작품처럼 비수로 꽂히는 것이 있었을까?
1인칭인 나(유정)가 이끌어가는 주제에, 사형수인 윤수의 블루노트가 이중적으로 엮어진 보기 드문 작품으로 블루노트를 읽어가면서 유정이가 만나는 사람이 윤수일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어떻게 보면 2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
윤수의 블루노트를 읽으면서 불우했던 내 과거가 오버럽되어 생채기가 덧나고 있었다.
누구에게 쉽게 내보이지 못한 상처, 그 상처를 도려내기 위해서 내 분신처럼 느껴지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인데 그 기회를 찾기란 무척 힘들다.
그래서 나는 읽는 내내 윤수가 되어 책 속에서 미로를 헤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과제를 수없이 만나고, 그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다양함을 안다.
주인공인 유정이가 열 다섯살에 유부남인 사촌 오빠에게 경험한 강간(성폭행)을 보는 시각에서부터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특히 가장 위로받고, 보복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던 엄마에게서 "다 큰 계집애가 어떻게 꼬리를 쳤기에...."라며 오히려 딸을 밀치는 엄마의 태도에서 삶을 받아들이는 다층적인 심리 상태를 읽었다.
딸이 가지게 될 꼴통(표출하지 못해서 생기는 울분이나 슬픔), 아니 분노보다 자신과 집안의 체면을 먼저 가지게 되는 성인들의 그 이중적인 잣대.
그것이 유정이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매개체였으며 모든 것을 파괴적으로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성격으로 몰아갔다.
주변인들은 모두 그런 유정이의 성격을 두고 고모의 대쪽같은 성격을 닮았다고 비아냥거리지만 그것은 자기를 지키는 무기였는지 모른다.
그런 유정이가 세번의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고모인 모니카 수녀의 손에 이끌려 가게 된 구치소에서 자신을 닮은 또 다른 꼴통 윤수를 만난다.
윤수는 술주정뱅이며 가정폭력자인 아버지, 동생 은수와 함께 생활하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고향을 떠나 앵벌이로 살아가면서 가난과 폭력이 주는 대가를 혹독하게 치룬다.
눈이 보이지 않는 동생 은수를 먼저 아버지 곁으로 보내고, 사랑하는 여잘 만났지만 자궁외 임신으로 생명이 위독하자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돈을 구하기 위해)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윤수.
그런 윤수와 유정이가 운명적인 만남을 한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을 안다고 했던가?
끝없는 오해와 갈등을 이겨내고 둘은 자신을 닮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사형수가 되어 가장 두려운 것이 아침이라는 윤수,
단풍처럼 가장 아름답게 죽어가고 싶다는 사형수 윤수,
당신이라는 우리 말이 있음을 감사하며 마음 한 구석에 당신(유정)을 심는 윤수,
유정을 보고 처음으로 살고 싶었다며 자신을 무장해제하는 윤수,
마음 속에 옹달샘으로 머물며 자신을 비추고 있는 윤수를 보면서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자신도 놀라버린 유정,
애국가를 부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윤수 동생 은수를 생각하며 기꺼이 내팽개친 애국가를 눈물로 부르는 전직 가수 유정이.
용서받을 수 있는 자 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윤수의 고백을 통해, 상처받은 영혼인 유정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다해 위로하고 싶다는 윤수의 일기를 통해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몰라 무서웠는데, 윤수를 통해 그 방법을 알았다는 유정이.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따뜻함이 깔린 배려가 여기저기 보였다.
배반에 익숙하다고 해서 배반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윤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했고, 그 배반이 두려워 차마 자신의 일을 고백하지 못했다.
그는 실제 누명을 쓴 사형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죽는 순간까지 유정이를 곁에 두고 싶어 그냥 진실을 보듬고 형장으로 사라진다.
인간의 죄를 법으로 재단하는 일.
특히 목숨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일이 정당할까?
오래도록 냉기를 몰고와 떠나지 않는 윤수의 일이 눈물을 가져왔고, 아직도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구조를 여전히 가지고 나아가야하는 지금의 우리 삶이 분노스럽기까지 하다.
더구나 폭력과 가난, 그리고 타인들의 무관심이 빚은 과거가 한 사람을 그늘로 숨게하는 스토리가 픽션이 많이 가미되지 않은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유정이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줄 알았다는 말에 기존의 공지영이 외치던 다소 페미니스트적인 입장이 숨어버린 점, 윤수가 잘못된 관행이나 판결에 과감히 맞서는 장면이 연출되지 않는 점, 그래서 여전히 막강한 권력 앞에 부서지는 서민적인 눈물이 점철될 수 밖에 없어 서운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나는 공지영의 저력이 팔딱이는 작품이었고, 그 방대한 자료 수집을 위해 직접 느끼고 체험하며 썼다는 작가의 고백대로 땀이 배어나는 작품이라 좋았다.
오늘은 꿈속에서 윤수와 유정이가 만나서 알콩달콩 나누는 사랑을 파노라마로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