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케치

무작정 떠나기

데조로 2006. 8. 9. 23:02

무작정 떠나보는 것은 지루한 일상을 설레게 한다.

여인네들 셋이서 무작정 1박 2일로 여행을 가기로 모종의 합의를 보고 아침에 집을 나섰다.

방학이라 단도리해야 할 아이들도 있고, 해야 할 일도 많았지만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가볍게 집을 나왔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자고 했던 취지를 살려 달랑 소지품을 담은 작은 가방 하나 들고 차를 탔다.

 

뜻하지 않게 발목을 잡은 것은 무더위였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고 떠날려고 했는데 그 무더위를 뚫고 여기저기 발품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계곡으로 방향 전환을 하고 보니 거기서 즐길만한 것들이 필요했다.

 

 

 

할인점에 들러 먹거리를 비롯한 이런저런 것을 사서 자연 휴양림으로 들어갔다.

평일이라 물이 많은 낮은 곳에만 인적이 보일뿐이어서 여인네들이 쉴만한 곳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계곡을 따라 깊게 깊게 올라갔다.

깨끗한 물을 염원한 것이 아니라 조용히 앉아서 수다를 떨만한 장소를 물색하다보니 산 정상에 가까워 있었다.

계곡물로는 유명한 곳이 아니어서 휴양림이지만 한적하고 깨끗했다.

대학다닐 때 해금강 민박집에서 온 밤을 살라먹으며 이야기하던 때를 빼고는 오롯이 셋이서 이렇게

여유있게 시간을 가지며 노는 일이 드물었던 우리는 시간이 아까워 온갖 비밀스런 이야기를 꺼내놓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서로를 위무하였다.

 

한 참을 놀다보니 아름다운 일몰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감성에 젖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모기였다.

산속이라 모기뿐만 아니라 온갖 벌레들이 군무를 펼치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김시인 부부가 우리를 찾아왔다.

낙안민속마을 내의 전통가옥인 초가에서 생활하고 있는 김시인은 일행들을 낙안민속마을로 안내했다.

 

그 시간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우리는 김시인 부부와 함께 밤문화에 젖어 시간가는 줄 몰랐다.

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조용한 밤에 김시인 집만 마당 가득 밤불을 밝히고 보름달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니 저마다의 마음에 달덩이를 하나씩 잉태하기 위해 그 귀한 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연잎차를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일까?

성대한(?) 저녁 식사가 좋아서 그런 것일까?

맘 맞는 지인들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공기좋은 낙안 민속마을의 효험때문일까?

잠못이루는 밤이 깊어갈수록 수다 속에 진한 인생의 역사가 오버럽되어 흘러나왔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낙안민속마을을 빠져나왔다.

그제서야 온 몸이 쑤셔왔다.

눈꺼풀도 게슴츠레해서 운전하기도 힘들고, 나른한 몸은 언제 고꾸라질지 모를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심호흡을 해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내려오는 눈꺼풀.....

 

어제 아침 일찍 나갔다가 다음날 이른 아침(?)에 들어오는 아내를 남편은 말없이 쳐다본다.

그대로 쓰러져 눈을 떠보니 오후였다.

그 사이에 아침과 점심 식사가 있었을 것이고, 아이들과 남편은 일상의 과업을 수행하러 나갔을 것이고.....

 

노는 것도 젊어서 하는 모양이다.

나이 먹은 것을 잊고  하루를 온전히 과격하게(?) 소비하고 돌아왔으니.....

신체적으로는 무척 힘들어도 이것이 내 삶을 지탱하는 에너지원으로 쓰일 것을 나는 안다.

 

여자들 셋이서 무작정 일상을 탈출해 겪은 하루의 잔해들이 고스란히 널려있는 오늘이 힘들게 기다리고 있어도 나는 행복하다.

무더위 속에서도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