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광목 커튼에 매달려
바리데기(황석영)의 여정 본문
방학이 끝난 후 독서모임에서 선정한 황석영의 [바리데기]
게으름의 결과 탓에 뒷걸음으로 만난 [바리데기]는 책 표지부터 슬픔이 가득 묻어왔다.
기존의 황석영 필체와 조금 다른 부류의 소설을 만났다는 것에 흥분을 느끼며 바리와의 여행을 시작한 9월 중순인 오늘은 태풍 '나리'로 인해 남도가 걱정과 근심으로 보내는 하루다.
여섯 언니를 둔 바리의 섧은 탄생.
엄마가 숲에 버린 바리를 흰둥이가 물고 집으로 와서 '버린다'의 뜻으로 바리라는 이름을 가진 계집애.
무가에서는 버린 공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광명, 생명, 소생의 공주라는 뜻에 부녀자를 낮춰 가리키는 데기의 접미사가 붙여져서 바리데기가 된 하늘이 내려준 아이.
황석영이 [바리데기]를 계획하며 의도적으로 런던에 체류하며 자료를 모으고, 중국 접경지역을 답사하고 인터뷰한 자료, 그리고 본인이 체험한 생활을 바탕으로 완성되었다는 이 소설은 지금의 한국문학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메시지를 준다.
책을 읽으면서 북한의 처참한 기아현상을 만나고, 이승과 저승의 세계,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문화 충돌, 종교와 신념 사이의 갈등, 극한 상황을 이겨내는 사람들의 인내, 그리고 낯익은 무가, 샤머니즘적인 신화를 만나게 된다.
보안법 위반으로 교도소 생활을 감내한 황석영씨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구구절절 녹아있는 방대한, 결코 정신적인 범주에 안착한 다른 소설과의 차별성도 느낀다.
나라님이 돌아가셨다고 학교에서 아이들이 들꽃을 모조리 쓸어와 꽃다발을 만들었다는 사회주의 냄새, 어느날 사라진 칠성이를 찾아 옥수수밭에 갔을 때 다친 칠성이의 마음속 소리를 들으며 "괜찮아, 내가 널 지켜줄게. 며칠만 쉬면 곧 나을거야" 라며 교감을 나누는 장면, 격한 세월의 흐름속에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사로 인해 무역상인 미꾸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중국땅에 도착한 할머니와 바리, 현이, 칠성이.
쫓고 쫓기는 불법 체류자가 되어 우리들이 익히 듣고 읽었던 탈북자들의 삶을 고스란히 만난다.
잡히지 않기 위해 산속에 허술한 움집을 만들어 추위를 피하다가 많은 눈사태로 인해 현이가 죽고, 고사리, 버섯 등을 채취하다가 할머니도 운명을 달리하고, 잠시 함께 했던 아버지도 행방이 묘연하여 바리는 새로운 삶을 개척한다.
열 다섯살이 되던 해에 샹 언니 내외를 도와 발 마사지를 하던 바리는 형부와 동업을 했던 이의 사기로 인해 또 다시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샹 언니와 런던행을 감행한다.
밀항선에서의 처절한 사투는 읽는 내내 서슬퍼런 독기를 품게했다.
콘테이너 박스에 짓눌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거나 산소를 공급받기위해 구멍을 찾아 호흡을 해야하는 상황, 간신히 몸만 가눌 수 있어 생리적인 현상을 옷에 그대로 해야하는 것이나 여자들을 벗겨놓고 윤간하는 장면에서는 숨이 멎을 듯 분노가 치밀었다.
바리는 고통속에 사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먼저 버려지는 아픔을 겪었을까?
그녀 앞에 펼쳐지는 인생은 어느 것 하나 녹록치 않았다.
샹언니와 헤어진 바리는 여전히 발 마사지로 생계를 이어간다.
발을 마사지하면서 그들이 걸어온 길을 훤히 내다볼 줄 아는 능력을 가진 바리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애정어린 시선을 받는다. 본디 순수하고 착한 바리라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녀의 일상에 죽은 이의 영혼과 대화하는 장면, 특히 할머니, 칠성이와의 대화는 영매의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어 과거, 현재,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하며 읽을 수 있었다.
파키스탄인인 알리와 결혼해서 홀리야 순이를 낳았지만 전쟁터에서 사라진 알리, 마약에 중독된 샹 언니의 사기와 죽음, 그리고 홀리야 순이의 안타까운 죽음 뒤에 21살이 되는 바리 앞에 홀연히 찾아온 남편 알리.
택시운전을 했던 알리는 새로운 가게를 하고, 바리는 2세를 잉태하지만 여전히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전쟁터로 북적거린다.
9.11테러, 종교간의 전쟁, 자본주의의 이기적인 팽배는 그들의 삶을 평화롭게 하지 못하게 한다.
사랑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불바다, 피바다, 모래바다를 건너면서 그녀가 그토록 갈구한 생명수는 어떤 의미일까?
"어째서 악한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지....", "죽음은 신의 슬픔이며 당신들의 절망"이라며 환영의 것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접하며 세상과 죽음은 그 어떤 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난무함을 일러주는 것 같아 마음에 휑한 바람이 불었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갈망하는 생명수가 조금씩 색깔이 다르다해서 사랑이 원류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때로는 나도 바리데기가 되어 내안의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더 큰 뜻으로 다른 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
***바리데기 노래***
바리야 바리야 어디가니
할머니 칠성아 나는 떠나요
이세상 모든길은 검은 바다
힘없는자들 절망의 노를 젓네
이강 건너 바다 건너 떠가다 보면
생명수 연못에 이르겠지
할머니 왜 내인생엔 슬픔만 있죠?
사람들은 왜 미움의 벽 쌓아가나요?
저들의 죽는 의미 말해주세요
죽임과 파괴는 언제끝나요?
미움은 우리가 만든 감옥이란다
세상끝의 사람들도 가족이란다
기다리고 견디는 세월따라
모든것들 지나가는 그자리에
세상 어디든 피어나는 희망의 꽃
아가야 너는 내삶의 모든이유라
고통불행 몰아쳐도 이겨내고
아름다운 생명의줄을 이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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