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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나온 타인의 글

시래기를 위하여

데조로 2012. 10. 3. 20:29

 

 

시래기를 위하여

고집스레 시래깃국을 먹지 않던 날들이 있었다
배추나 무의 쓸데없는 겉잎을 말린 것이 시래기라면
쓰레기와 시래기가 다른 게 무엇인가
노오란 배춧속을 감싸고 있던
너펄너펄 그 퍼런 잎들
짐승 주기는 아깝고 있는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는 것
그 중간 아래 영하의 바람 속에서
늘 빳빳하게 언 채 널려있던 추레한 빨래처럼
궁색의 상징물로 처마에 걸려있던 시래깃두름이
부끄러워서였는지도 모른다
난 시래기로나 엮일 겉잎보다는
속노란 배춧속이거나 매끈한 무 뿌리이기만을 꿈꾸었을 것이다
세상에 되는 일 많지 않고 어느새
진입해보지도 않은 중심에서 밀려나 술을 마실 때
술국으로 시래기만한 것이 없음을 안다
내가 자꾸 중심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뛰고 있을 때
묵묵히 시래기를 그러모아
한 춤 한 춤 묶는 이 있었으리라
허물어가는 흙벽 무너지는 서까래 밑을 오롯이 지키며
스스로 시래기가 된 사람들 있었으리라
알찬 배춧속을 위해 탄탄한 무 뿌리를 위해서
시래기를 배운다
시래기는 쓰레기가 아닌 것이다
(복효근·시인,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