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광목 커튼에 매달려
영화 [태풍]은 내 안의 바람을 잠재우지 못했다. 본문
겨울 허공에 떠다니는 냉기는 쉬이 가시질 않았다.
하얀 눈발 세례와 함께 겨울 초반을 가득 메운 추위 속에서 차라리 태풍이라도 불면 지저분한 잔상으로 남은 눈도 모조리 떠나갈 것 같은 느낌이어서 영화관엘 갔다.
크리스마스 이브라 북적거린 사람들은 왜그리 많은지....
대형작들이 함께 상영되고 있어서 더 붐비었겠지만 킹콩이나 작업의 정석, 파랑주의보 보다 흡인력이 있는 영화 태풍 속으로 떠났다.
[친구]를 감독한 곽경택, 그리도 멋진 장동건, 이정재 그리고 이미연....
그들의 이름 뒤에 따라다니는 수식어만큼 내 기대는 이미 포말을 형성해서 바람따라 금방 일어설 것 같았다.
더구나 태국과 러시아 등을 배경으로 한 이국적인 풍경, 분단 국가인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슬픈 가족사, 각 나라 사이에서 일어나는 보이지 않는 이권, 그리고 개인이 갖는 팽팽한 가치관의 차이, 150억이라는 거대한 제작비 등.
관객을 유혹하는 명구에 이미 길들여진 우리는 바쁘게 돌아가는 필름 속으로 빠지며 내게 던질 화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씬(장동건 역할)은 20년 전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귀순하려 했으나 중국과의 관계를 우려한 한국정부의 외면으로 북으로 보내지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들의 눈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것을 목격한다. 그는 누나인 최명주(이미연 역할)와 함께 어렵사리 북한을 빠져나오지만 누나와 이별을 한다. 씬은 온갖 극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핵 미사일의 방향을 조절하는 위성유도장치를 탈취하는 해적의 우두머리가 되어 어릴 적 슬픈 가족사을 가져다 준 한반도에 대해 끊임없이 분노를 키우고, 한 쪽 가슴에는 어디에선가 자신의 유일한 핏줄로 살아가고 있을 누나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을 키운다.
최명주는 암시장의 매춘부로 살면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하루하루 생명을 잇는 것 조차 힘들게 살아간다. 그녀에겐 어린 동생과 살아가기 위해 일찍 경험했던 성폭행이 어쩌면 생의 의미를 잘라 버렸는지 모른다. 그녀의 생활이 씬에 비해 무게감이 덜한 것은 영화의 전면에 부각시키기 다소 어려운 소재가 숨어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지......
강세종(이정재 역할)은 해군사관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유능한 인재다. 그의 아버지 또한 중령으로 장렬히 전사한 이력을 지니고 있는, 어쩌면 냉철한 피가 흐르는 이성적인 휴머니스트였다.
국가 정보원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해군 대위 강세종은 방콕, 한국, 러시아 등을 돌며 끊임없이 씬을 추적한다.
조국과 가족을 잃어버리고 뜨거운 분노를 삼키는 씬과 조국과 가족을 지켜야하는 해군 대위 강세종, 그리고 따뜻한 용서의 마음을 품은 여자 최명주는 어쩌면 불운한 가족사 뿐만 아니라 분단이 가져다 준 아픔이며, 약소국가가 화인처럼 붙들고 갈 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 애를 쓰고 있었다.
특히 오른쪽 볼에 둥그런 칼자국을 보이며 야성적인 면을 표현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배우 장동건과 차가운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 낸 이정재, 어둡고 우울하지만 따뜻함을 잃지 않은 슬픔을 고요히 간직한 배우 이미연의 연기에는 찬사를 보낸다.
어느 것 하나 빈틈없이 연기해 내는 그들의 표정을 읽으며 많이도 흡입되어 갔지만 영화를 이끌어가는 기술이나 편집상의 문제는 다소 영화의 질을 격하시키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톡이라는 공간에서 명신(씬)과 명주가 만나 해후의 눈물을 훔치는 장면, 그리고 강세종이 아직 장가가지 않은 동료들만 모아(이성적이지만 다소 휴머니스트적인 면) 비밀리에 태풍을 향해 떠나기 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 상황에서 엄마에게 쓰는 편지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 밖에 없는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러나 복수를 담고 남한을 향해 쫓아오는 태풍(배)이 미국의 어뢰에 맞아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배 안에서의 세종과 씬의 결투는 긴장과 교감을 유도하려 했으나 결말을 무리하게 이끌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태풍의 포스터에서처럼 적도 친구도 될 수 없는 두 남자가 화해가 아닌 결투를 통해 한 사람이 끝내 무너져 한 사람의 승리(?)로 이끌어가는 구도의 인위적인 표현을 보며 다소 우울했다.
아나키스트가 보면 어떤 메시지를 남겼을까?
탈북하여 남한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이 보면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명주를 만나면서 씬의 어두운 과거사를 알고, 명주의 깊은 생채기를 알면서도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아니 남북이 화해하는 무드를 찾아가는 방법은 없었을까?
한 인간의 상처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서둘러 가자는 씬이 누나를 안식하는 장면(총으로 죽이는~~)을 어떻게 완전 이해를 해야할지.....
태풍(TYPHOON)이 내 안에 부는 바람을 잠재워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오히려 그 태풍이 던진 화두를 오래오래 끌어 안아야 할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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