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광목 커튼에 매달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꽃들의 혁명 본문

마실 나온 타인의 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꽃들의 혁명

데조로 2007. 3. 18. 16:12
꽃샘추위가 참으로 매서웠습니다. 며칠 따스했던 햇살에도 꽃샘추위에 시달렸던 봄의 흔적들은 잔뜩 몸을 움츠리고, 혹시나 꽃샘추위가 남아있지 않을까 경계하고 있습니다. 봄은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눈을 들어보니 여기저기 봄이 온 흔적들이 완연하고, 꽃망울들은 이젠 더 참을 수 없다고 야단법석입니다.

▲ 물양귀비
ⓒ 김민수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너무 아프니까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더라. 꽃이 꽃으로 보여야 하는데 하고 생각을 함에도 불구하고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더라."

그렇겠지요. 봄을 노래하고, 꽃을 노래한다는 것은 아픔의 깊은 나락에 빠져있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별세계에 살아서가 아니라 아직도 노래하는 만큼의 희망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와도 통하겠지요.

▲ 노루귀가족들
ⓒ 김민수
그런데 말이죠. 그런 작은 희망조차도 싹뚝싹뚝 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겨우 살만한 것 같아!" 기지개를 켤 때 엄습하는 꽃샘추위처럼, 잠시 왔다가는 것이 아니라 사나흘 넘게 머무르면서 싹 틔운 모든 것들을 다 얼려 버리는 추위처럼 다가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희망'을 노래하고 '작은 것, 못 생긴 것, 낮은 것'을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 실파들의 군무
ⓒ 김민수
간혹 세상이 너무 미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너무 사랑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한 때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봄을 보면서 혁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혁명이라는 말이 금기되던 때를 지나 이젠 심드렁한 단어로 변하다 못해 다시 생소해진 요즘에 다시 그 단어를 떠올리는 것은 이 시대가 혁명적인 변화가 없이는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여기저기서 춤을 추는 새싹들
ⓒ 김민수
초심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마지막처럼 처음처럼 살아가는 의미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느 단체나 조직도 그렇습니다. 초심을 잃어버리면, 부패하게 마련입니다.

눈을 들어 산야를 보니 어느 날 갑자기 봄이 혁명처럼 다가왔더군요. 그 작은 새싹들의 군무를 보니 마치 축제의 밤을 보는 듯합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 출퇴근을 하면서 눈을 맞추는 새싹에 어서 꽃몽우리 맺히고, 꽃이 피어날 날을 손꼽아 봅니다. 계절이 바통을 이어가는 것은 아주 조용해서 어느 날 갑자기 계절의 변화가 실감나서 당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내 '아! 봄이구나!'하며 계절을 맞이하지요. 어느 날 갑자기 혁명처럼 다가온 봄의 흔적들을 보시면서 행복하시길.
2007-03-17 11:25
ⓒ 2007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