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광목 커튼에 매달려
[리진]을 닮은 여자는 어디 없을까?(신경숙 작) 본문
어느 블로그에서 리진을 소개한 글을 읽고 무작정 그 여인의 향기에 젖고 싶었다.
김탁환의 [리심]으로 이미 세상에 알려진 여인이지만 아직도 한국의 근대와 전 근대의 치열한 역사 속에 갇혀있는 여인.
신경숙 작가의 말대로 A4용지 1장반의 분량으로 남아있는 여인.
신분과 국적을 초월하여 사랑을 나누었으며, 예술적인 감성과 총명함으로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여인.
벌써 내 마음은 큰 물결 속으로 빨려가고 있었다.
1905년 이폴리트 프랑댕이 쓴 [En Coree]
고아인 리진은 다섯 살에 궁에 들어가 궁중 무희가 된다.
왕궁 옆에 자리한 반촌의 서씨에게 키워진 리진은 고아이면서 실어증을 가진 강연과 같이 돈독한 우애와 사랑을 경험하며 생활한다. 특히 블랑주교에서 불어를 배우며 자연스럽게 프랑스를 배워나가는데, 그것이 곧 콜랭과 만나게 되는 인연이 된다.
프랑스 공사 콜랭이 고종과의 알현을 위해 궁에 들어왔다가 금천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무희의 검은 눈동자에 매료된다. 낯선 이국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 여인이 왕의 여자인 무희라 험난함이 예견되지만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조선의 국익을 위해서 노력하겠다는 약조를 하는 콜랭.
딸처럼 키운 무희지만 “한 남자를 사이에 둔 그런 인연이고 싶지 않다”며 왕의 관심에 은근한 질투를 느끼며 국익을 핑계로 콜랭의 여인을 주도한 왕비.
동고동락했던 강연의 사랑을 애써 외면한 리진은 콜랭을 따라 프랑스로 간다.
19세기 말은 프랑스의 문화가 번성한 때로 조금씩 미지의 땅인 조선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지만 동양 여자 리진은 이방인에 불과했다.
프랑스에 머물던 홍종우의 거침없는 입담과 조선을 향한 충성, 그리고 리진을 향해 다가오는 음울한 사랑, 조선을 홍보하기 위한 번역 작업 등에 동참하지만 리진의 생활은 여전히 조선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의 하루는 바쁘다고 했던가?
행복한 것보다는 외로움을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가슴 속 골깊은 곳에 자리한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리진은 촌음의 시간도 헛되이 보낼 수 없었는지 모른다. 파리의 연인은 될 수 있었으나 파리의 여인이 되지 못한 리진......
프랑스 생활은 그녀의 삶에 양분이 되기는 했지만 행복을 가져다주는 환경은 되지 못했음을 우리는 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타자이어야 하는 슬픔.
모파상과의 교류와 프랑스의 문화 유적을 접하면서 그는 궁녀의 신분에서 근대적 여성주체가 되어가지만 온전한 프랑스인이 되지는 못한다.
특히 콜랭이 리진과 그토록 같이 가기를 원했던 고향을 찾아가지 못한다거나 콜랭의 어머니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남자를 보면서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한 사내를 만난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는 없었다.
콜랭이 사들인 조선의 유물에 대한 집착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리진은 “나도 조선의 유물처럼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 같다”며 콜랭을 질책하는 글귀에선 묘한 카타르시스도 경험했다.
한 여자의 남자보다는 외교관으로서의 길을 택한 콜랭은 휴가를 얻어 리진과 조선으로 돌아온다.
다시 무희의 신분으로 돌아온 리진은 조선의 복장이 아닌 서구 복식 차림으로 왕궁을 출입하고, 고아원에서 아이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며 강연을 향한 마음을 점화시키지만 리진을 사랑한 홍종우의 방해로 오히려 강연은 손가락을 절단하고 대금 조차 불지 못한 신세가 되어 유배된다.
사랑?
리진과 콜랭의 사랑, 홍종우의 리진을 향한 사랑, 강연의 일편담심 사랑, 리진을 향한 왕의 사랑(관심), 리진을 딸처럼 애지중지하는 왕비의 사랑 등, 참으로 다양한 색채의 사랑을 접하면서 선뜻 어느 하나의 사랑도 해패엔딩이 되지 못해 독자가 되는 나는 막막한 감정을 걸러내야 했다.
근대의 문화를 접하면서도 결코 완전한 자기 해체를 하지 못한 리진이 안타깝지만 때로는 답답하였다. 그 많은 예술적 감성을 소유하고, 그가 가야할 길이 그렇게 광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선을 고집하고, 자기 땅으로 회귀하려는 것은 명성황후와의 인간적인 친밀감과 사랑, 그리고 강연에 대한 가슴 저 밑바닥의 원초적 본능에 충실한 것이었을까?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했던 왕비의 시해 목격과 고종의 아관파천 등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리진이 블랑주교가 주고 간 불한사전의 종이 사이사이에 비상을 묻혀 그 종이를 삼키며 자살을 한 리진.
그녀가 꿈꾼 미래는 어떤 빛깔일까?
그녀가 왕비의 시해 현장을 낱낱이 적어서 공사관인 콜랭(길린)에게 보냈던 것은 일본의 소행을 알리기 위한 방법이었을 텐데 콜랭은 자신을 향한 리진의 마음이 한 글자도 수록되지 않음을 알고 서운한 마음에 그대로 사장시켜 버린 일이나 조선의 혼란한 시기를 틈타 조선의 유물을 프랑스로 반입하는 일이나 사랑보다는 외교관으로서 살기를 더 우선시하는 콜랭을 보면서 국수적인 성향의 프랑스인을 만난 것 같아 애증의 마음이 교차되었다. 역시 순수함은 예나 지금이나 수시로 다른 옷을 입을 수 있는 변덕쟁이며, 그 순수성은 쉽게 퇴색될 수 있다는 것을 느껴야하는 신경숙의 [리진]
어떤 문학평론가는 뉴에이지 소설이라 하여 역사소설이지만 현대소설 같은 느낌을 살린 책이라고 [리진]을 소개했다. 신경숙다운 문체로 역사와 사랑, 그리고 현대인들의 의식을 두드리는 것까지 접목하여 역시 신경숙다운 리진을 만날 수 있었다.
“리진이 어떤 여자냐고요? 일단 아름다운 여자이고요, 우리가 잊어버린 여자에서 탈출할 기회를 가졌으나 근대의 폭력 앞에서 자기를 실현할 수 없었던 여자, 한 페이지 반의 기록에 갇혀 있던 여자,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자….”라고 신경숙은 리진을 말했지만 나는 “리진은 마음이 여린 여자, 21세기에 다시 태어나야할 여자, 여자가 봐도 사랑스러울 수 밖에 없는 여자, 그녀를 닮고 싶은 여자가 많은 여자....”로 소개하면서 강연에게는 슬픈 사랑이지만 리진의 무덤 옆에 손가락이 잘린 남자가 죽어있었다는 글귀에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받은 그녀는 참 행복한 여자였구나라는 늦은 술회를 덧붙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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