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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이야기

박사가 사랑한 수식(오가와 요코)

데조로 2008. 10. 6. 09:24

  오가와 요코라는 작가는 내게 생경스럽다.

하루키나 가오리, 류 등의 일본 작가들에 익숙해 있었던 내게 제목부터 특이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모험같은 책이었다.

아무런 관계나 규칙, 실체가 없는 것들에 인간이 1을 더하면 0(無)이 되어 버리는 오일러 공식을 사랑한 박사.

이루지못할 사랑이라는 것을 느꼈음일까?

없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존재하는 0처럼, 자신의 사랑도 그렇게 흐르고 있음을 암시하는 복선같다.

 

 

  천재 수학자는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후 기억이 80분만 지속되는 특이한 기억구조를 갖게 되고, 스물 여덟의 미혼모가 그 집에 파출부로 가면서 겪게되는 아름다운 우정이 묻어나는 소설이다.

아이들은 연약하여 어른의 보호를 받아야한다며 혼자 집에 있을 파출부의 아들을 데려오라고 해서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루트"라며 다음 날 생각날 수 있도록 " 새 파출부와 그 아들 열 살 루트"라고 명찰을 붙이는 수학자.

   

  셋은 숫자와 야구라는 공통의 화제거리가 있어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교류를 갖는다.

단순하게 가사도우미로서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자를 이해하고 탐구하여 그가 수식을 사랑하고, 소수를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지원했기 때문에 숫자로 타인과 교류하고,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수학자가 세상과 교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래 전의 기억에 멈춰있지만 수학적인 이론만큼은 시들지 않았던 수학자를 위해 그가 좋아한 야구선수 카드를 수집하고, 야구장에 함께가며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며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 母子의 따뜻한 인간애에 가슴마저 데워졌다.

  책을 읽는 동안 암담함과 함께 찾아온 내게 만약 80분만 기억되는 뇌구조가 찾아온다면?

아픈 기억은 상실의 기쁨을 만들 것이고, 좋은 기억은 아쉬움으로 남겠지만 어쩐지 조급한 마음이 생겼다.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서고.........

 

   수학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는 또 한 여인.

그녀는 그의 형수다. 미망인으로 있으면서 그를 바라보는 사랑으로 아픈 가슴을 대신한.

그런 마음을 수학자는 알고 있을까?

그가 그렇게 숫자에 집착한 것은 그녀와의 인연을 아직 풀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지....

내면에 얼마나 깊은 강이 흐를지, 생각만으로도 절절한 슬픔이었다.

 

  소재의 신선함도 좋고, 따뜻한 인간미를 내세운 것도 좋고, 다소 식상하거나 편식이 될 수도 있는 숫자를 어느새 사랑하게 만든 작가의 힘도 좋고, 모처럼 괜찮은 소설을 만나서 이 가을이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파출부 일을 그만두고도 가끔 요양원에 있는 수학자를 찾아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루트는 수학선생님이 되어 수학자를 회상하는 그들의 마음이 이 가을에 천리 밖까지 향을 나른다는 금목서처럼 우리들의 가슴에 오래오래 향기나는 사람들로 기억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가와 요코의 다른 책을 만나러 얼른 서점으로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