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광목 커튼에 매달려
철 이른 [철쭉제]를 기다리며(문순태의 철쭉제) 본문
책꽂이를 뒤져서 1981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찾았다.
대상작은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2]였으나 나는 우수작으로 뽑힌 문순태의 [철쭉제]를 읽었다.
박완서 보다는 문순태의 글이 훨씬 감겨오는 강도가 크기 때문에....
[징소리], [걸어서 하늘까지] 등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문순태는 역사적인 소설, 특히 지리산을 기반으로 한 소설을 쓴 작가로 유명한데 시적 요소를 가미하여 독자들을 지루하지 않게 배려하는 소설가이다.
특히 아름다운 우리말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공책을 옆에두고 새로운 낱말을 써가며 읽는 즐거움이라니.....
이 소설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러 지리산을 오르는 5일 간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나(검사)와 과거 머슴의 아들인 박판돌, 지관인 박영감, 미스 현 등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 아버지가 박판돌에게 끌려가고 난 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아픈 과거를 가진 아들이 복수심을 키워 검사가 되고, 박판돌을 앞세워 세석평전을 오르는 지리산 기행문 같은 것이다.
철쭉이 만발한 지리산에서 펼쳐지는 비극적인 가족사는 봉건적 신분 제도와 6.25 전쟁 등에 얽힌 우리 역사의 비극적 면모를 담아내고 있다. ‘철쭉제’에서 철쭉의 붉은 시각적 이미지는 한을 상징하고, ‘제(:제사, 축제)’는 화해와 용서의 의미를 가진다. 즉, ‘철쭉제’라는 제목은 불행한 과거로 인한 한을 풀어내는 화해와 용서의 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시신을 찾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 검사는 박판돌과의 대면을 앞두고 두려움에 떤다.
과거 박판돌이 뱀 껍질을 벗겨 아그작아그작 씹으며 헤헤거린 모습과 아버지를 끌고 가던 그 험악한 표정 그리고 자신을 업어주었던 그 따뜻한 등이 클로즈업되어서 묘한 감정을 느끼며 추억 속에 잠긴다.
박판돌은 설움을 바탕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례의 유지(비료공장 사장, 학교 운영위원장)로 입지를 굳힌 상태지만 과거 자신이 모셨던 상전의 아들인 검사 앞에서는 다소 비굴할 수 밖에....
더구나 검사 아버지의 죽음을 부르는 당사자였으니......
서로 해갈되지 못한 마음 속 응어리를 가지며 지리산으로 검사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간다.
지리산에 동행한 인물은 모두 6명(검사, 박판돌, 지관 박영감, 미스 현, 인부 2명)이다.
지리산을 세세하게 표현하는데 능란한 솜씨(?)를 갖고 있는 문순태의 장황한 설명에 다소 주눅이 들었지만 가보지 않아도 철쭉제가 열리는 세석평전을 올라간 느낌이다.
아버지의 유골이 묻힌 세석평전에 오르면서 박판돌과 미스 현, 검사와 미스 현, 인부와 미스 현의 사랑놀음이 이뤄져서 읽는 동안 내내 불편했다.
흐름을 꺾어버린 듯한 느낌. 그리고 유골을 찾으러 가면서 난데없이 색정에 빠져버린 검사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이것이 대상이 되지 못한 큰 브레이크였다고 하니 이해가 되었다.
세석 평전.
매년 철쭉제가 열리는 철쭉의 군락지. 색깔이 유난히도 붉었던 철쭉 아래 아버지가 방치(?)되어 있었는데, 유골을 칭칭감고 있는 철쭉 뿌리 탓에 그나마 유골의 손상이 덜했다고 하니....
유골을 찾았지만 아버지의 유언대로, 또 박영감이 좋다는 그곳에 다시 아버지를 묻는다.
내려오는 길에 박판돌은 본인의 아버지를 검사의 아버지가 총으로 쏴 죽였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박판돌의 어머니를 검사의 할아버지가 범하고, 그 사실을 검사의 아버지가 알고는 사냥가서 총으로 쏴 죽이는, 물론 머슴을 벗어나고자 족보가 필요했던 박판돌의 아버지는 아내가 상전의 노리개가 되고 있는 것을 알지만 참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홀연히 떠난 박판돌의 아버지. 그리고 떠돌이가 되어버린 박판돌과 어머니. 박판돌의 귀향(?)이 얽혀서 만들어낸 소설이지만 스토리 보다는 지리산의 배경이 소설의 주를 이루고 있어 소설로서의 치열한 감정 대립이나 극한 상황을 읽어보지 못해 아쉬웠다.
두 사람 다 '아비 찾기'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그 숨막히는 자식들의 분노와 복수 그리고 화해를 보면서 마음에 쏴~~하고 바람이 불었다. 원류도 모르는 바람이........
이상문학상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 같은 부분이 여러 군데서 감지되었지만 그래도 문순태 만이 갖는 독특한 필체나 스토리 전개, 그리고 지리산 지킴이로서의 세세한 표현 능력은 박수를 보낼만하다.
그리하여 철쭉이 뭉퉁뭉퉁 핀다는 세석평전이나 신선이 살 것 같은 천왕봉에 오르고 싶은 충동을 심어주었다.
내일은 서점에 들러 문순태의 또 다른 작품을 사냥해야겠다.
'책과 영화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진이와 놈이의 비극적인 사랑(홍석중의 황진이) (0) | 2006.01.31 |
---|---|
지나치게 아름다운 게이 로맨스 (0) | 2006.01.21 |
홍세화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읽고 (0) | 2006.01.09 |
우리는 장작불 같은거야(안도현 엮음) (0) | 2005.12.29 |
영화 [태풍]은 내 안의 바람을 잠재우지 못했다. (0) | 2005.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