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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토닉 러브를 들려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데조로 2009. 12. 14. 15:44

 

17세기 이름 높은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사랑한 모리스 라벨(1875-1937)은 [왕녀 마가레타의 초상]을 보고 1899년 그의 나이 24세때 피아노 곡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작곡하였다. 라벨이 에드몽 드 폴리냑 공작 부인을 위해 헌정한 곡이라지만 서민인 자기 신분과는 다른 왕녀를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은 플라토닉 러브였다고 하니........

62세 모리스 라벨이 사망할때까지 독신으로 살았다는 글을 읽고 그의 가슴에 남아 있을 한 여인은 어쩌면 참으로 행복했거나 절망했을 것 같다.

 

박민규 소설의 [죽은 왕녀를 파반느]

아는 블로거의 방에서 박민규 소설을 접하고, 많은 대중을 사로잡은 그의 힘은 어디에 있는지 한 번 마주하고 싶었다.

제목에 붙은 '파반느'란 말은 느린 2박자의 춤곡을 말한다.

사랑을 표현한 춤은 어떤 흐름으로 전개되었을지 자못 궁금해진 것은 내게 있어 소설보다 더한 궁금증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는 이야기.

못생긴 여자를 사랑한 '나', 그리고 영혼의 동반자인 '요한' , '그녀'가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체다.

하나같이 아픔을 간직한 상처많은 사람들이다.

누가 콕~찌르면 몇 년 묵은 아픔까지 절절하게 흘러나올 듯한 설움, 그리고 누구에게도 쉬이 꺼낼 수 없는 자기만의 침잠된 고통, 세상과 쉽게 타협하지 못한 아집, 절규.......

세상은 아름다움과 부와 권력이 함께 만들어가는 굴렁쇠다.

어느 것 하나라도 부재가 찾아오면 고스란히 생채기가 되어 인생에 오점을 남기기 일쑤다.

그녀는 못생긴, 세상에서 여태 볼 수 없었던 극한의 추함을 가진 여자다.

어디서건 능력은 외모 뒤에 숨어서 울어야 하고, 그 울음은 차곡차곡 내재되어 마음의 문을 굳건하게 닫힌다.

 

스무살, 우연찮게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그녀.

마음의 문을 열기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간 '나'.

어쩌면 '나'에게도 세상의 문을 향한 절규가 숨어있었는지 모른다.

포스터의 [켄터키 옛집]이란 팻말을 단 호프집에서 요한과 나, 그리고 그녀의 일상이 조금씩 밝은 빛으로 채색된다.

닫혔던 마음이 열릴 때는 상대방에게 올곧게 올인할 수 있는 분위기로 오는 법.

일상적인 말투며 표정이 그들의 기쁨이 되고, 자신의 컴플렉스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아 해방된 자아를 만끽해 보는 날이 온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

그녀는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탈피하지 못하고 꼭꼭 숨어버리고 만다.

방황하며 그녀를 기다리다 소설을 쓰고, 술을 마시고, 인생을 재설계하고, 고독과 치열하게 싸우고......

10여년이 지난 후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으며 그녀를 생각하다 수소문하여 독일로 가서 그녀와 해후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

'나'에 대해 대부분의 것들을 공유한 요한(자살을 하려다 미수에 그친 과거를 가진)과 그녀(요양보호사)가 결혼을 하여 죽은 '나'를 만나러 와서 영원한 사랑을 말하고 돌아가지만 한 여인을 오래도록 가슴에 품고 산 '나'의 마음을 헤아려보니 가슴에 찬 바람이 가득찬다.

 

부와 아름다움의 이데올로기에서 철저히 해방된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런 소수의 사람이 많아지기를 소원한다.

소설 속의 '나'처럼, 모리스 라벨의 일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