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광목 커튼에 매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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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의 여유

기차는 8시에 떠나는데 나는?

데조로 2005. 11. 29. 09:11

거센 바람으로 인해 노란 은행잎이 도로를 점령했다.

차가 지날 때마다 몸을 세워 날카롭게 질주하는 은행잎이 어디에 쫓기고 있는 듯 내 시선을 가두었다.

은행잎이 가는 곳을 따라가던 눈길이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지칠 때 쯤 또 다시 바람이 앞서서 은행잎을 멀리멀리 보내고 만다.

그런 은행잎을 쫓는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환경미화원이었다.

가만히 두면 노란 춤사위를 맘껏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분들의 애환도 있으리란 생각에 CD플레이어 볼륨을 키웠다.

며칠 전에 산 아그네스 발차의 곡이 흐른다.

그리스가 터키와 독일로부터 침략을 당했을 때 그 슬픈 국민적 정서를 담아낸 곡이 대부분인 내 조국이 들려준 노래, 아그네스 발차의 곡은 들을 때마다 닿는 느낌이 다르다.

메조소프라노인 아그네스 발차의 풍부한 성량과 애절한 보이스가 겹쳐서 슬픈 감정이 배가된 노래인 우체부, 5월의 어느 날, 기차는 8시에 떠나네 등을 듣고 있으니 눈물이 났다.

 

-To Treno Fevgi Stis Okto(기차는 8시에 떠나네)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않으리

기차는 멀리 떠나가고 당신은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반독재 민주화운동가가 그의 애인과 기차역에서 만나 지중해 연안의 작은 도시 카테리니로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차마 같이가지 못하고, 애인만 보내야하는 상황이 조국의 암울한 시대적 배경과 겹쳐서 쓸쓸함을 더하고 있다.  그것이 영영 이별인 줄 알면서 보낸 청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 채 애절한 노래는 내 마음에 휑하니 바람을 얹어 놓고 간다.  

운전을 하면서 혼자 흘리는 눈물.

그것은 오늘 아침 풍경이 남긴 산물이 아니고, 어제의 내 감정이 아직 삭지 못하고 남아 있어서이다.

사는 것이 참 힘들다.

예전에는 이런 감정이 많지를 않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서러움과 서운함이 많이 생겨난 것 같다.

점차 고갈되어 가는 것이 감정이라는데.....

감정과 반비례하며 따라나오는 이 무서운 괴력.

내가 갖고 있는 정체성이 손상을 입었을 때나 내가 무장하고 있는 갑옷이 벗겨졌을 때 맛보는 것을 어디에 비한단 말인가?

최선은 아닐지라도 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관계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이 보인다.

피는 보이지 않지만 가슴에 심한 상처를 남긴 채......

부자라고 생각했던 가슴이 피폐해져 이젠 낙엽타는 냄새까지 진동한다.

주저리주저리 달고 있는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바람불면 또 굉음을 내며 같이 따라 나설 것 같다.

푸른 젊음으로 나부꼈던 잡초가 건조해져 푸석푸석한 잔상으로 남아있는 모습이 지금의 내모습 그대로다.

 

저녁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직장에 와서도 눈꺼풀은 자꾸 시야를 방해한다.

 

고인 양이 많으면 넘쳐야 하고, 고인 것이 삭으면 퍼내야 한다는데....

꼬리를 무는 상념을 잠재우기 힘든 하루.....

또다시 직장인으로 돌아와 그 감정을 추스릴 수 있는 시간이 있어 다행이다.

아니 그런 감정을 잠시 잊을 수 있어 좋다.

바람은 내 마음을 아는지 날카로운 촉수로 강타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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